『 ARBEIT MACHT FREI 』
폴란드 제2의 도시 크라카우에서 60여키로 떨어진 오쉬비엥침이란 곳에
나치 정권이 설치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의 입구 철조망에 붙어있는
문구이다.
영문도 모르고 유태인 정착촌으로의 이주라는 말만 듣고 끌려와 정문을
통과해서 죽어간 수백만의 유태인들에게 그 문구는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
졌을까 ?
열심히 일하면 풀려 날 수 있다."
노동을 통해 근심을 잊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라 .
정도의 메세지로는 받아들였을까 ?
1945년 종전이 되기 까지 몇 년동안 수백만이 넘는 유태인, 러시아인,
폴란드인 등 많은 종족들이 집단 학살되었던 곳 - 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정부는 그 역사의 현장 수용소 건물을 손질하여 박물관으로 꾸미고
후세인들에게 그 당시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다. 60여년이 지나 그 당시의
흔적은 그대로 다 남아있지는 않지만 당시의 수용소 막사, 수많은 관련
사진들, 자료들, 유물들을 통해 그 참혹했던 상황을 상상하고도 남는다.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들어올 때 소지했던 가방, 생활용품,식기류, 옷가지,
장신구, 신발류, 의수,의족 같은 의료 보조 방비에서부터 살해되기 직전
자른 머리카락 뭉치, 그리고 그 자른 머리카락으로 짠 옷감, 사진들,
그리고 과거 막사로 사용되었던 박물관 건물 가득히 쌓여있는 유품들과
집단 학살이 자행된 가스실, 시체를 태워버리기 위한 화장시설 등을 바라다
보면 당시 나치스의 만행의 정도와 규모를 짐작케 한다.
히틀러의 狂氣인가 ?
나치집단의 국수주의의인가 ?
아니면 게르만 민족의 패권주의를 갈망한 독일 국민들의 묵시 때문인가 ?
그래서 최근의 방송을 통해 보는 중동의 화약고라는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모습들은 참으로 희한한 역사의 아이로니를 보는 듯 하다.
과거에 독일로부터 핍박 당했던 유태인들이 이제는 반대로 타민족인
팔레스타인인들과 우위적 입장에서 인종 갈등을 겪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아우슈비츠의 비극의 해답을 찾을수 있을 듯 하다.
유태인 말살 정책을 펼쳤던 독일 나치집단의 입장에서는 국민들을 설득할
어떤 명분이나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 행여 독일 땅에서 살면서 독일인보다
더 잘 살고 돈 많은 이민족 집단을 보는 시각이 왜곡될 수 밖에 없지는
않았을까 ? 지금도 미국등 세계 곳곳에서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언론, 예술,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유태인이란 민족의 특질과 숨은 저력이 그때에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된 것은 아닐까 ? Heile Hitler를 외치는 충성심의 원천을 인종적
우월감을 자극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찾으려 한 것은 아니였을까 ?
상상의 꼬리는 쉽게 잡혀지지 않았다.
다만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박물관 입구에 붙어 있는 문구가 그 해답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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