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히 떠오르는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떠올려본다.
당시 국민학교라고 불렸고 1950년대 말 60년대 초 이야기다.
1~2학년때는 2키로 정도 걸어서 분교로 통학하였고 3학년때
부터는 6키로 정도 거리에 있는 면소재지 본교로 등하교했었다.
9시 등교시간을 맟추려면 6시 반쯤 밥을 먹고 나서 신작로를 따라
등교하는 동네 선후배들과 어울려서 재잘거리며 걷다보면 2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그 당시엔 콘크리트 다리가 없고 겨우 돌다리나 만들어서 건너던
시절이라 여름에 빗물로 개울이 불면 학교를 가다가 되돌아 오는
경우도 많았고 학교에서 수업중 비가 많이 오면 미리 조퇴를 시켜
주기도 하고 부모나 어른들이 개울가까지 마중을 나오기도 했었다,
그 당시엔 산에 나무가 별로 많지 않아서인지 수해(水害)도 많아서
개답차(불도저)를 이용 망가진 논밭을 개간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유가 되면 장마로 망가진 신작로나 동네 길도 새로 평평하게
정비해주며 복귀하기도 해서 불도저 기사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시엔 집에 바쁜 농사일로 결석을 하기도 하고, 몸이 아파도 병원엔
갈 생각도 못하고 힘들게 학교에 갔던 일도 있었고, 학교에 가는 길에
뺑손이 치고 물가에서 놀던 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꼴 베러 다니고
나무하러 다니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 당시엔 시골 아이들은 다 그런 환경에 익숙하게 동화가 되었기에
순수했고 불평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그래도 4학년때 부임해 오신 담임선생님의 격려로 공부에
몰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다행히 군 소재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순탄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쯤인가 동네마다 스피커를 이용한 유선방송시스템이
생겨서 KBS라디오 방송을 하루 종일 송출해서 처음으로 방송을 듣게
되었는데 면에서 급한 연락사항이 있으면 이장은 이 유선방송을 활용
전달사항을 연락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동네 물레방아간 수차를 이용 전기를 자가발전해서 등잔불을
대체하는 변혁도 일어났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초등학교 동문회에서 개교100주년 행사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코로나 사태로 몇 년을 미루다 내년 봄으로 계획을 잡았다고 한다.
지금은 전교생이라야 몇십명 되지 않는 시골 면소재지 학교지만
100년 넘게 버텨오며 8,700여명의 동문을 배출했다니 졸업생으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되어 두서없이 몇자 적어보았다.